박사가 사랑한 수식

그에게는 숫자는 상대방과 악수하기 위해 내미는 오른손이며 동시에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코트였다.

"그렇지. 소수 중에서 짝수는 2. 딱 하나 뿐이다. 소수 번호 1의 1번 타자, 리드오프맨은 혼자 선두에 서서 무한한 소수를 이끌고 있는 것이란다."
"외롭지 않을까요?"
"아니 걱정할 것 없다. 외로워지면, 잠시 소수의 세계를 더나 짝수의 세계에 가면 친구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우애수도 그렇고 쌍둥이 소수도 그렇고, 적확함은 물론 시의 한 구절에서 빠져나온 듯한 수줍음이 느껴진다.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그 속에서 숫자들이 서로 포옹하기도 하고, 똑같은 옷을 차려입고 손을 마주 잡은 채 서 있기도 한다.

정답을 얻었을 때 박사가 느끼는 것은 환희나 해방이 아니라 조용함이었던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지면을 보다 깊은 세계가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나는 놀라고 감탄한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처럼 또는 오일러의 공식처럼, 의연하게 있으면 그만이다.

어떤 숫자든 가리지 않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 그에 합당한 신분을 부여하는 루트 기호 같구나"

-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 중

선방일기

"본능을 억제한다고 해서 반드시 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선객에겐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있지요.
본능 억제는 필요조건에 해당되고 견성은 충분조건에 해당되겠지요.
필요조건은 수단 같은 것이어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본능 억제가 하나의 수단이라면 그 역인 본능 개발도 또한 수단이 되겠지요.
필요조건인 본능 억제가 없더라도 충분조건인 자성이 투철하면 견성의 요건은 충족되겠지요."

"그렇지요.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가능한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할 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형이하학적인 한계성과 가능성은 배제되고 필연성만이 문제되는 거지요.

'인간이란 자기의 존재에 있어서 자기의 존재가 문제가 되는 존재'라고 사르트르가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타인에 대하여 필요 이상의 존재이며 타인도 나에 대하여 필요 이상의 존재'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을 내립니다.
'원죄란 타인이 있는 세계 중에 내가 태어난 것'이라고.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생명이 단절된 죽음의 저편에  때로 존재하는 세계를 말함이 아니고, 부조리하고 무분별한 실재(백팔번뇌)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조화시킨 생명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 지허 스님의 '선방일기' 중

참 단정한 책 한권이다

칼의 노래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삶은 집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분산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기는 하되, 삶은 그 전환 속에 있을 것이었다.

소금은 먼데서 오는 시간의 가루처럼 염전 바닥에 내려앉았다.
정유년 가을에 바람이 고와서 소금은 고요했다.

- 김 훈의 '칼의 노래' 중

칼의 노래에 대해 내내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애국심도 비장함도 아니고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정해져있지만,
날짜는 정해지지 않은 초조함이랄까
충무공의 죽음에 대한 부분은 매우 간결하게 끝나지만,
올 것이 드디어 왔구나 그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과도 같았다

서른의 당신에게

어려움에 부딪히면 그 어려움을 이기려고 하거나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몰두하는 그 무엇의 긍정적인 힘으로 상황을 극복하여 가는 편이 더 현명한 생활방법인것 같다.

권력과 정치의 정치적인(진실과 인간다움보다는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작동 방식 속에서 인간이 마땅히 그래야 할 인격적인 생존 방식을 지키는 방법에 대한 고민의 지점이었다.

직업인으로서의 생활은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삶의 근원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점차 윤기를 잃어가며 소모적인 순환에 갇혀 있다.

삶의 실체는 죽음이 꾸는 꿈이다.
죽음이 그 잠시 동안의 순간에 강렬히 살아있고자 함이다.

그의 칼은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정치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가 정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는 그를 두려워했다.

스스로 무너지고 위기에 처하는 것은 어리석다.
왜냐하면 세상은, 사람들이 빚어 놓은 세계는, 내 생명을 자진 납부할 만큼 존귀하고 위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세상이 인정하는 가치들을 무시하거나 자만적 허무에 빠지는 것도 어리석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보다 존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특징은 말끝마다 아하하하 하고 웃으시는데, 이야기에 웃음을 붙인다기보다 하루 종일 큰 소리로 웃으시고, 그 웃는 가운데 대화를 나누신다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마음의 편안함은 내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 속의 그물망을 짜서 만들어 가는 생활 속에서 제일 중요한 기준이라 할 수 있다.
불편함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일이야 물론 허다하지만, 그러한 중심의 지향을 갖고 안 갖고는 그 과정과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나와 내 주변에 동심원으로 즐거움이 퍼져 나가게 만드는 것이, 그렇게 각자 노력하며 만나는 것이 사회아 관계가 되도록.

차별은 격리를 불러오고 격리는 폭력을 구조화한다.
이러한 악순환을 깨뜨리는 것은 차별당하는 쪽에서 더 이상 못 참겠다 하고 들고 일어나는 경우이거나, 구조화된 폭력으로 이익을 얻는 것이 더 이상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대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으로는 사람 차별이 마음에 그냥 거슬린다는 본성이 우리에게 체화되어야 제대로 치유된 세상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그와 같은 본성이 내 마음속에 제대로 자리 잡고 있는가 하는 것과, 적어도 학교에서, 사회 속에서 체득할 기회가 있는가 하는 것.

문화는 덧입는 옷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는 삶의 방식이다.
여유가 있어야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있는 수준에서 어떻게 아름압게 나를 표현하는가 하는 양식의 문제이다.

권력 통제의 가장 직접적이고 근원적인 대상은 개인의 몸이다.
개인의 몸을 길들여야 순종하는 정신이 따라오고 질서가 유지될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 권력과 개인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며 충돌하는 전장은 바로 개인의 육체 그 자체가 된다.

- 강금실의 '서른의 당신에게'

선물받은 책인데 일단 책 제목이 그닥 맘에 들지 않았고
유명인의 자기 경험담 쯤이라고 생각해서 읽지 않고 있었는데,
읽고 나니 선물 해주신 분의 뜻을 알겠다

삶의 주변부에서 맴돌지 않고 중심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어딘가 모르게 억척스럽거나, 초월한 느낌이 있는데
금실 언니는 닳거나 다 알고 있다는 그런 스탠스가 아니다
'삶' 자체에 파고드는 것을 두려워 하는 느낌도 있는데
결국은 중심에 서있다
고민과 두려움은 있되 그렇다고 물러나거나 질척거리지 않는..
왠지 모르게 매우 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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